안녕하세요 김 기자님과 스태프님들,
1. 마지막으로 시승기를 썼던게 2019년 도쿄에 살 때, 렉서스 NX 가솔린 터보였습니다.
그 이후 코로나가 터지면서… 살던 나라도 바뀌고, 이직도 여러번 하게되고, 핑계 같지만 삶에 뜻하지 않은 변화가 너무 많다보니 조용히 앉아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날때마다 시승기와 뉴스를 봐오다가 오늘만큼은 글 한자락을 남기고 싶어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5년전 호주로 이사온 이후 덜컥 사게된 차가 렉스턴입니다. 평생 인연이 없을거라 생각했던 뚱뚱하고 무거운 차를 왜 샀는가 하면, 충돌 안전 때문입니다. 미국처럼 호주도 픽업트럭 붐이 엄청난데요, 1년에 한번 오프로드 갈까 말까 한 사람들이 전부 포드 레인저와 그 동급의 차들을 사재끼다보니 10년 가까이 판매량 1,2위를 차지하고 있지요.
제가 좋아하는 세단과 웨건이 아무리 충돌테스트 별 5개를 받아도, 실제 사고시 지상고가 압도적으로 높고 훨씬 무거운 차량과 부딪히면 본넷은 생략하고 바로 앞유리와 A필러에 충격이 올만큼 높이차가 큽니다. 만16세면 여기 남학생들은 면허를 따는데, 중고 트럭을 사서 난폭운전을 하는 걸 직접 보고나서는 가족용 차는 나도 높고 무겁게 가는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굳혔습니다.
미국과 달리 호주에서 인기많은 트럭은 F150 같은 풀사이즈가 아니라, 포드 레인저나 도요타 하이럭스 같은 개발도상국향 한 급 아래 모델들 입니다. 이 차들에서 적재함을 제거하고 SUV 처럼 만든 파생 모델도 꽤 많이 팔리는데, 트럭 태생의 한계인지 승차감, 정숙성, 실내품질 모두 불만족스러웠고 가격은 터무니 없이 비싸서 전혀 구매의욕이 생기지 않더군요.
그러다가 한 번 타보기나 하자 한게 렉스턴인데, 트럭 파생형들과는 모든면에서 급을 달리하는 인상을 받았고 사게 됐습니다. 동급 유니바디에 비해 승차감이 떨어지는건 맞지만, 한국에 갔을때 동생차 혼다 파일럿을 몰아보니 ‘이 정도면 차이가 좀 나네…’ 했고, 솔직히 여기서 파는 팰리나 쏘렌토 둘 다 시승해봤는데.. 얘네들에 비하면 크게 나쁜지 잘 모르겠습니다.
2020년에 사서 지금껏 5만을 좀 못 탔는데, 정기 서비스외에 센터에 간 일이 없고, 매우 만족하며 타는 중입니다.
그 사이 쌍용은 새 주인을 찾았고, 이름도 바꿔달았습니다.
2. 완성차 제조업이 원래 마진율이 높지 않고, 이익을 내고 생존 하려면 규모의 경제가 필수적이다 보니 앞으로의 모든 신차에 체리차의 플랫폼을 사용하려는 것 같습니다.
기업에서 기획/재무를 업으로 삼아온 입장에서, 이 회사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제가 걱정하는 점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 전 차종에 체리 플랫폼을 적용 할 경우
체리 플랫폼 도입을 통해 모듈화 된 전동화 파워트레인을 설계 변경 없이 최대한 많은 차종에 적용하려는 회사의 의도는 잘 알겠습니다. 그래야 규모의 경제 실현으로 비용이 절감 되니까요. 그런데 차값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충분한 고민을 한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랜드로버도 체리의 플랫폼을 일부 차종에 적용한다지만, 중국차 ‘택갈이’가 아님을 애써 설명해야 하는 상황은 불가피 할 것이고 이는 판매가격을 억누르는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 브랜드 유산의 백지화
모든 차량을 체리 플랫폼으로 만들경우, 1세대 무쏘와 체어맨을 시작으로 90년대 벤츠의 DNA를 이어받아 지금까지도 쌍용하면 ‘투박하지만 튼튼한차’, ‘한 때는 최고급 SUV의 상징’으로 지금껏 쌓아온 유무형의 브랜드 자산은 백지가 됩니다.
지리자동차 기반의 그랑 콜레오스가 혈통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에서 나름 선전중인 이유는, 지리가 볼보의 대주주로서 상당한 기술공유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 정통 유럽 브랜드인 르노 로고가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자신의 브랜드를 백지로 만들고 체리차에 내외장만 일부 변경해서 팔게 되는 KG 는 르노코리아와 달리 ‘중국차 택갈이’라는 이미지를 희석할 수 있는 수단이 없습니다.
- 대당 이익률이 생명
비용을 낮추려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익을 늘리는 것입니다만, 이럴 경우 낮아지는 비용만큼 차값도 싸게 책정하지 않을 수 없게되고, 결국 가장 큰 과제인 대당 이익률의 개선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게 됩니다.
판매가격은 어느정도 방어하면서 비용을 낮춰야 대당이익이 살아나는데, 자신의 브랜드를 스스로 소멸시키고 나면 가격방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판매되는 차량 1대당 플랫폼 사용을 위한 로열티까지 지불하고 나면 이익률 개선은 더욱 요원해집니다.
-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려면 플래그십 만큼은 자체개발 해야
대당 이익률의 유지/향상을 위해서는 브랜드 관리가 최우선 입니다. 한국차도 중국차도 아닌 어정쩡한 차를 현대, 기아와 별반 차이없는 가격을 주고 사려는 소비자는 극소수입니다. 가격을 확 낮추면 팔리기야 하겠지만, 그럴거면 체리가 한국에 직접 법인을 설립하고 판매하면 되지 KG가 굳이 필요할까 하는 더욱 근본적인 의문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KG만의 자동차 철학, 디자인의 방향성을 상징하는 플래그십 모델만큼은 자체 개발해야 합니다. 그 아래 볼륨 모델들은 체리의 플랫폼을 채용하되, 플래그십이 제시한 디자인 언어를 충실히 반영시키고, 서스펜션 셋업등 차량의 기본기에는 ‘KG 철학’을 최대한 반영시켜 “이 차는 체리라는 ‘태아’로 부터 시작됐으나 KG가 준 뼈와 살을 갖고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자동차”라는 메세지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 도요타도 같은 프레임을 20년이상 사용
해외에서 렉스턴과 동급으로 인식되는 도요타 프라도의 경우 2002년부터 2023년 풀모델 체인지까지 약 21년간 같은 프레임을 썼습니다. 그 윗급 랜드크루저또한 2007년 부터 2021년 까지, 풀체인지에 가까운 페이스리프트만 있었고 약 14년간 프레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렉스턴의 경우 2017년 현 프레임을 개발했고 이제 8년차에 접어들었지요. 바디온프레임 모델은 전세계를 통틀어 봐도 프레임의 사용주기가 긴 편입니다.
프레임에는 최소한의 변화만 주고, 여기에 맞는 전동화 파워트레인을 개발하는 한편, KG의 새로운 방향에 맞게 내외장을 풀체인지 해서 새로운 플래그십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체리에서 사오는것 보다 돈이 많이 들겠지만, 자동차 산업에서 푼돈 들여 큰돈 버는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코란도 플랫폼을 늘려 토레스를 만드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패션족을 겨냥해서 내놓은 액티언의 반응이 어땠는지 보면 그렇습니다. 큰돈을 들여 큰돈을 버는게 완성차 산업에서의 정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큰 바구니가 있습니다. 작은 블럭부터 집어넣으면 큰 블럭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큰것 부터 넣고 그 틈에 작은것들을 끼워 넣어야 합니다.
비용을 절감하려는 노력은 작은 블럭입니다. 브랜드는 큰 블럭입니다. 브랜드가 없으면 그 차를 사려는 사람이 없고, 비용을 절감할 이유도 없습니다.
저와 같은 소시민의 말이 회사에 들어갈리가 없겠지만, 몇 년간 KG의 행보를 보면서 가져왔던 답답함을, 오랫동안 신뢰해온 기자님께는 한번 드려보고 싶어 쓸데없이 긴 글을 남깁니다.
*사실 가장 먼저 쓰고 싶었던 글은 지난 3년간 제 발이 되어준 2세대 푸조 308 웨건에 대한 소감이었습니다. 아내가 새 차를 들여서 곧 팔게되었지만 너무도 사랑한 차였기에 조만간 꼭 시승기를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