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 "더 이상의 W12 엔진은 없다"

  • 기자명 박종제 에디터
  • 입력 2020.11.13 17:3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6월, 벤틀리는 거의 60년 전에 처음 개발된 V8 엔진, L 시리즈 엔진을 완전히 단종시킨다고 발표했다. 환경규제가 바뀔 때마다 개선에 개선을 거듭하면서도 1958년에 개발된 오리지널 엔진의 거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6.75L의 이 엔진이었다. 하지만 L 시리즈 엔진으로는 더 이상 탄소 배출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으며, 특히 이 엔진을 사용하는 마지막 모델이었던 뮬산이 단종됨에 따라 더 이상 이 엔진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벤틀리는 여전히 8기통 이상 대형 엔진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중 하나가 또다시 단종될 예정이라 한다. 대상은 바로 W12 엔진이다. 이 엔진은 엄밀히 말해 벤틀리 엔진은 아니다. 벤틀리 브랜드를 인수한 VW이 2001년 개발을 완성한 엔진이다. 원래 VW이 개발해 사용하고 있던 협각 V6라 불리는 VR6 엔진이 양쪽으로 붙어 있는 듯한 형상이어서 W12로 명명된 이 엔진은 원래 VW이 준비하고 있던 슈퍼카 프로젝트에 쓰일 예정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원래 목적에는 사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폐기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제대로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아우디 A8의 최상위 버전을 시작으로 VW의 페이톤, 투아렉을 비롯해 부가티만 사용하고 있는 W16 엔진의 베이스가 되기도 했고, 지금은 사라진 스포츠카 브랜드, 스피케르에 공급되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브랜드에서 W12 엔진을 사용했는데, 이 엔진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알렸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판매한 브랜드는 단연코 벤틀리다. 벤틀리는 컨티넨털 GT를 시작으로, 플라잉 스퍼와 현재의 벤테이가에 이르기까지 W12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현재 벤틀리의 플라잉 B 배지가 까만색으로 채워져 있다면 W12 엔진이 들어가 있다는 의미이다. 참고로 빨간색 플라잉 B 배지는 V8 엔진을 사용한다. 단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빨간색 플라잉 B 배지라고 해서 낮은 등급이라든지 저렴한 벤틀리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애초에 벤틀리에게 저렴이라는 개념은 없으니 말이다. 왜냐하면 최상위 모델이었던 플래그십 뮬산도 L 시리즈 V8 엔진을 사용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W12 엔진이 갖는 상징성은 분명하다. 벤틀리뿐만 아니라 모든 프리미엄 럭셔리 브랜드에서 12라는 숫자는 완벽, 사치 그리고 익스클루시브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낮추고 더 높은 효율성을 외치고 있는 이 시대에도 벤틀리를 포함한 몇몇 브랜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12기통 엔진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12기통 특유의 비교할 수 없는 부드러운 가속감을 경험해보고자 하는 고객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지금도 V12 혹은 W12는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하지만 더욱더 까다로워지는 환경규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먼저 BMW와 메르세데스 벤츠가 V12 엔진의 추가 개발을 포기했고, 벤틀리 역시 다음과 같은 선언을 남겼다.

“더 이상 W12 엔진은 없습니다.”

벤테이가와 플라잉 스퍼, 컨티넨털 GT에 폭넓게 쓰이는 6L W12 기통을 단종시키겠다는 이야기다. 이유는 한 가지다. 이 엔진이 만들어 내는 이산화탄소량이 점차 강화되는 탄소 배출 제한을 포함한 환경규제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벤틀리의 발표에 따르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W12 엔진을 단종시키고 그 자리를 이보다 적은 실린더를 가진 엔진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출력을 만들어 내는 측면에서는 현재 V8만으로도 충분하다. 따라서 W12 특유의 실키한 감성만 아니라면 성능은 물론이고 특히 효율성에서도 V8이 W12를 대체하기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울트라 럭셔리 브랜드들 대부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에 앞서 타협하지 않으만 안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어쩌면 W12의 폐지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불가피한 결정인지도 모른다.

다만 당장 단종시키겠다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벤틀리는 2026년까지는 현재의 W12 엔진을 사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따라서 컨티넨털 GT를 비롯해 다양한 벤틀리 모델에서 W12 엔진을 당분간은 경험할 수 있을 예정이다. 다만 벤틀리는 적어도 2030년까지는 V8 엔진과 더불어 V6 엔진으로 파워 트레인을 대체할 계획이며, 추가적으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로 파워트레인 플랜을 전면 수정할 것이라 전했다.

또한 전동화에 대해서도 다양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 전동화가 진행되면 벤틀리 혹은 롤스로이스와 같이 극한의 정숙성을 특징으로 삼는 럭셔리 세단들에게는 오히려 유리한 점이 많다. 아무리 W12 엔진이 조용하고 부드러우며 믿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다지만, 전기모터의 정숙성이나 가속감에 비하면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벤틀리는 전동화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으며, 준비 과정으로 W12 폐지를 비롯해 보수적인 소비자들이 충분히 수긍할만한 시간을 두기 위해 2030년까지는 내연기관을 지속하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벤틀리는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는 거의 최초로 V6 하이브리드 엔진을 발표한 바 있다. 2018년에 발표한 벤테이가 하이브리드는 V6 엔진과 더불어 전기모터가 장착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로 이미 유럽에서는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한국을 비롯해 다양한 국가에서 V6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벤틀리만의 정체성이 사라진다고 우려를 표할지도 모른다. 특히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12기통 엔진이 사라진다는 것은 럭셔리 브랜드의 마지막 자존심이 꺾이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다.

아마 벤틀리는 뮬산의 L 시리즈 엔진 단종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W12 단종 직전에 몇 가지 특별한 에디션 모델을 내놓을 것이다. 만약 W12 기통 특유의 부드러움과 여유를 느끼고 싶다면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그때를 기다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박종제 에디터는?

F1 레이싱 코리아 전 편집장으로 포뮬러 1과 관련된 뉴스 그리고 레이스의 생생한 이야기와 트랙 밖의 이야기를 다수의 매체를 통해 전해왔다.

레드불 코리아, 한국 타이어 매거진 뮤(MiU) 등의 온/오프라인 채널에 F1, 24h 르망, WRC 등 다양한 글로벌 모터스포츠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모터스포츠 및 자동차 전문 에디터다.

저작권자 © 오토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