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 L 시리즈 엔진, 60년만에 단종

  • 기자명 박종제 에디터
  • 입력 2020.06.1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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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풀 체인지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보통 신차가 출시되면 4~5년 후면 페이스리프트로 생명력을 연장하고, 다음 5년이 지나면 완전히 새로운 차로 교체되는 것이 거의 정석에 가까웠지만, 최근에는 이 주기가 3년 + 3년 혹은 2년 +3~4년 정도로 무척 짧아졌다. 빠른 신차 교체 주기는 기업에게 신차효과를 좀 더 빨리 가져다주므로 수익 확대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문제는 개발 기간의 단축으로 인해 결함 발생이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문제점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거의 모든 자동차 제조사들이 전에 없이 빠른 교체 주기로 신차를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허나 엔진만큼은 완전한 교체가 좀처럼 쉽지 않다. 하나의 엔진을 백지상태부터 새롭게 만드는 일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기도 하며, 특히 내구성을 확보하고 성능을 끌어 올리는 것부터 이를 새로운 환경 규제에 맞추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든 일이다.

그래서 많은 제조사들이 고생 끝에 만들어 낸 엔진을 규제와 요구에 맞게 개량하면서 새로운 이름을 붙여 새 엔진으로 공개하는 경우가 많다. 엄밀히 따지면 성능 개선형이지만, 새 엔진을 온전히 개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품이나 성능의 대대적인 개선이 있을 경우 새 엔진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자리잡았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사골이라 부르며 언제까지 우려먹을거냐고 볼멘소리도 터트린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마 어지간한 엔진들은 사골이라 부르기 힘들 것이다.

벤틀리를 잘 들여다 보면 이따금 플라잉 B 엠블럼이 검정색이 아닌 빨간색으로 채워진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어김없이 머플러 팁의 형태도 조금 다른 편이다. 일명 레드라벨이라 불리는 이 엠블럼은 V12가 아닌 V8 엔진이 들어가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현재 벤틀리는 이렇게 V12와 V8 두 가지 엔진 타입을 공급하고 있는데, 이 중 V8 엔진은 놀랍게도 무려 60년 전에 개발됐던 것이다. 사골이라 표현한다면 아마 이런 사골도 없을 것이다.

L 시리즈 엔진이라 불리는 벤틀리의 V8엔진이 처음 개발된 것은 1959년으로 당시 벤틀리는 영국 정부에 의해 롤스로이스와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롤스로이스 벤틀리 L 시리즈 V8 엔진이라 불러야 하는데, 최초로 이 엔진이 탑재된 차량은 1959년 롤스로이스 실버 클라우드 2였다.

2차 대전 당시 비행기 엔진(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개발했던 롤스로이스는 자동차용 엔진 개발을 위한 막대한 데이터와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는데, 이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 직후 자동차용 V8 엔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개발된 L410 엔진은 알루미늄 합금 블록에 수냉식 워터재킷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멀린 엔진에서 가져온 점화 플러그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 외에도 멀린 엔진 디자인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는데, 덕분에 최악의 정비성을 가지고 있었다 전해진다. 예를 들면 점화플러그를 교체하려면 앞 쪽 휠을 떼어 내야 하는 식이었다.

당시 이 엔진은 최고 168.5km/h의 속도를 냈으며, 6.25L의 배기량 덕분에 22L/100km (환산하면 4.5km/L)라는 최악의 연비를 보여줬지만,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는 가장 부드럽고 여유있는 출력의 생산이 목적이었고, 느슨했던 환경 규제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후 이 엔진은 롤스로이스 팬텀 5와 함께 다양한 벤틀리 모델에 적용됐는데, 1968년에 이르러서는 6.75L로 배기량을 높였다.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출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터보차져를 장착하는 등 수많은 개선작업을 거쳤다. VW그룹으로 벤틀리가 인수된 이후에도 이 엔진은 폐기되지 않고 몇 가지 추가 개선 과정을 거쳐 그대로 사용됐다. 물론 VW의 다른 브랜드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오직 벤틀리에게만 적용됐다. 그도 그럴 것이 6.75L라는 엄청난 배기량을 필요로 하는 브랜드는 오직 벤틀리 뿐이었기 때문이다.

VW의 기술을 적용해 개선작업을 거친 L 시리즈 엔진은 특히 점차 까다로워지는 환경규제를 통과하기 위해 배기가스 개선 작업에 집중했는데, 덕분에 1958년 오리지널 L410 엔진에 비해 무려 99%나 유해 배기가스가 감소했다. 또한 182마력에 불과했던 출력 역시 530마력으로 업그레이드 되었고, 토크도 상당한 업그레이드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 시리즈 엔진의 근본적인 부분은 오리지널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이 엔진은 무려 60년 동안 계속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 60년간 생산된 L 엔진은 모두 36,000기로 의외로 생산량이 많지 않은데, 이는 롤스로이스와 벤틀리의 판매량이 많을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결과다. 현재도 이 엔진은 영국 크루 공장에서 모두 손으로 조립되며 숙련공이 한 기의 엔진을 완전히 조립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5시간이라 전해진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이 엔진을 만날 수 없게 됐다. 현재 이 엔진을 탑재하는 차량은 뮬산이 유일한데, 새로운 뮬산은 말 그대로 처참한 판매량을 기록한 모델로 VW에서는 더 이상 팔리지 않는 뮬산을 단종시키고 플라잉 스퍼를 벤틀리의 플래그 십으로 쓸 계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L 시리즈 엔진을 사용하는 유일한 모델, 뮬산의 모델 폐지가 결정됨에 따라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엔진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전망이다.

물론 떠나가는 마지막을 허전하게 내버려두진 않는다. 벤틀리는 뮬산의 단종을 앞두고 뮬리너 버전을 적용한 30대의 마지막 뮬산을 만들 예정이다. 그리고 마지막 30대의 물산에는 60년동안 함께 한 6.75L V8 L 엔진을 탑재될 것이다.

끝으로 벤틀리의 새로운 플래그십이 될 플라잉 스퍼는 이제 6L W12 / 4L V8 / V6 하이브리드 엔진을 탑재할 예정인데, 아마 벤틀리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V6 하이브리드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쉬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 벤틀리의 거의 모든 모델은 전동화 작업을 거쳐 생산될테니 말이다.

부드럽기 이를데 없는 실키한 감성의 엔진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아쉬움으로 남겠지만, 벤틀리 뿐만 아니라 롤스로이스 역시 부드럽고 조용하며 빠르다라는 것을 오랫동안 자신들의 드라이빙 캐릭터로 삼아왔던만큼 전동화 전략은 그들의 드라이빙 캐릭터를 새로운 시대에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명쾌한 해답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박종제 에디터는?

F1 레이싱 코리아 전 편집장으로 포뮬러 1과 관련된 뉴스 그리고 레이스의 생생한 이야기와 트랙 밖의 이야기를 다수의 매체를 통해 전해왔다.

레드불 코리아, 한국 타이어 매거진 뮤(MiU) 등의 온/오프라인 채널에 F1, 24h 르망, WRC 등 다양한 글로벌 모터스포츠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모터스포츠 및 자동차 전문 에디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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