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페라리 푸로산게(Prosangue)
목적이 다른 슈퍼 SUV, 충성 고객을 위한 선물
푸로산게(Purosangue)는 페라리가 처음 만든 4도어 4인승 모델이다. 푸로산게 개발 소식이 알려졌을 때 과연 어떤 구성으로 시장에 나올지 업계의 관심이 대단했었다. V8 엔진과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이 조합될 것인가 또는 페라리의 상징 V12 자연흡기 엔진이 얹어질 것인가에 대한 많은 추측들이 오갔다.
페라리 모델이 V12 엔진을 탑재하고 나온다는 것은 페라리 라이프를 시작하려는 고객보다 기존의 충성도 높은 고객들에 대한 헌정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즉 V12 페라리는 지금까지 페라리와의 인연이 없다면 원해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푸로산게는 V12 엔진을 탑재하고 나왔다. 대중성을 뒤로하고 이전부터 4도어 4인승 페라리 모델을 원했던 고객들을 택한 것. 페라리를 가족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자사의 충성 고객들에게 먼저 먼저 열어준 것이다. 또한 페라리는 전체 차량 판매량의 20%의 비중만 푸로산게 생산에 할당하겠다고 선언했다. 수익성을 목표로 컴포트 모델을 제작하는 다른 제조사들과 선을 긋는다는 의미다.
EXTERIOR (디자인)
푸로산게의 디자인은 공기역학 성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전반적인 실루엣은 롱노즈 숏데크의 비율로 완성됐다. 보닛의 곡선과 윈드스크린이 매끄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전면 윈드 스크린의 각도를 기울였고 공기 흐름이 복잡해지는 루프와 리어 스크린도 매끄럽게 다듬었다. 후면부에서 발생하는 와류는 루프 엔드의 서스펜디드 스포일러(Suspended spoiler)와 트렁크 라인 끝의 놀더(Nolder)가 정리한다.
휠 하우스 내부의 차오르는 유체를 최대한 추출해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도 고속 크루징 성능이 강조되는 페라리 모델이 갖춰야 할 성능이다. 이를 위해 덕트로 공기 흐름을 유도하고 고속 주행 중 차체가 떠오르는 효과를 최소화시켰다. 후미등 하단에도 공기가 흐를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졌는데 후륜 휠 하우스 내부의 공기를 배출하기 위한 목적이다.
정면에서 보닛을 바라보면 좌, 우측에 공기가 흐를 수 있는 에어로브리지(Aerobridge)가 시선을 이끈다. 이는 F12 베를리네타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요소인데 2시터 모델인 F12는 이를 다운포스를 높이기 위해 사용했는데 푸로산게의 에어로브리지는 항력을 줄이는 목적으로 쓰인다.
전면 헤드라이트 상단에 위치한 공기 흡입구는 엔진으로 공기 흐름을 유도해 냉각 성능을 최적화한다. 이러한 요소로 헤드램프와 주간 주행등은 분리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밖에도 차량 하단과 내부에는 공기 흐름을 원활하게 유도하는 다양한 요소와 능동형 범퍼 플랩이 갖춰져 있다.
도어는 전자식이다. 버튼을 눌러 모터의 도움으로 열고 닫는 방식이다. 뒷문은 코치 형식으로 여닫힌다. 그러나 일부 모델과 달리 앞문과 뒷문을 모두 개방했을 때 B 필러가 드러난다. B 필러는 블랙 컬러로 칠해진다. 트렁크 공간이 넓지는 않은데 적재 공간보다 성능과 스타일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부족한 공간의 한계는 뒷좌석을 접어 해소할 수 있긴 하다.
INTERIOR (실내 및 구성)
실내도 독창적이다. 대시보드는 조수석과 대칭을 이룬 운전석이 특징이다.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갖췄는데 운전석의 계기판 디스플레이처럼 조수석에도 10.2인치 디스플레이를 달아 조수석 탑승자가 동일한 감성을 느끼게 배려했다.
페라리는 스티어링에서 손을 떼지 않고 주행 중 필요한 필수적인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는 독특한 인터페이스를 갖고 있다. 스티어링 휠에는 엔진 스타트 터치 버튼, 방향 지시등, 주행 및 서스펜션 모드 설정, 와이퍼 조절, 볼륨 조절, 디스플레이 계기판 컨트롤, 기어 변속 등 다양한 기능들이 갖춰져 있다. 물리 버튼은 조작감이 양호했고 사용상 불편은 없었지만 스티어링 좌, 우에 위치한 터치 버튼의 직관성은 부족했다.
공조 시스템을 비롯해 시트 통풍, 히팅 및 마사지, 서포트 등 디테일한 기능들은 중앙의 로터를 터치, 돌려서 조절할 수 있다. 사용 중 시선이 머무는 시간을 제법 요구하는데 어지러운 버튼의 배열 대신 공간을 깔끔하게 구성할 수 있다는 면은 좋지만 사용을 위해 거쳐야 할 단계(Depth)가 많은 편.
실내에 쓰인 소재는 가죽, 알루미늄, 카본파이버, 하이그로시 소재가 주를 이룬다. 시승차는 토르토라(Tortora) 컬러의 가죽으로 감싸져 화사하고 고급스러운 실내 분위기를 냈다. 시트도 동일한 색상으로 페라리 엠블럼이 양각으로 새겨진 헤드레스트를 비롯해 알칸타라와 알루미늄을 디테일 요소로 삽입했다.
시트는 앉았을 때 신체 하부가 폭 담기는 버킷 스타일로 가속도에 대한 지지감이 좋다. 스티어링을 비롯해 시트의 조절 범위도 넓어 원하는 드라이빙 포지션을 찾기 쉬워 좋았다.
뒷좌석에 앉으면 운전석보다 더 차량 내부로 파고드는 형상인데 포지션이 꽤 낮다. 외관 디자인으로 인해 부족할 수 있는 헤드룸을 보상하는 듯.
센터 콘솔에는 변속 레버와 비상등, 윈도 스위치가 갖춰진다. 원형 버튼을 사용하다가 페라리 로마부터 형태를 바꾼 변속 레버로 과거 수동 변속기를 탑재했던 페라리의 H 게이트 구조가 연상된다.
런치 컨트롤 작동 스위치도 이곳에 위치하는데, 런치 컨트롤은 매뉴얼 변속 선택 후 활성 시킬 수 있다. 런치 컨트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런치 컨트롤을 사용하는 동안 기어 변속이 자동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N.V.H (정숙성)
푸로산게는 페라리가 만들어낸 모델 중 가장 편안한 여정을 만들어 주다. 그러나 측정된 소음 수치를 보면 그리 조용하지 않다. 오토뷰 정숙성 평가 기준 일반 아스팔트에서 약 65.2dBA의 소음 수준을 보였는데 이는 보편적인 중형 세단이 110km/h의 속도로 주행했을 때 발생하는 소음 수준과 유사하다.
물론 소음이 약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음 속에 V12 엔진의 존재감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한편 푸로산게가 110km/h로 달릴 때의 소음은 66.4dBA 수준으로 80km/h 주행 때와 큰 변화를 느끼기 어려웠다. 푸로산게는 두터운 측면 유리를 가졌는데 약 6mm 정도의 두께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정차 상태의 아이들 소음은 49.6dBA로 컴포트 모드 기준이며 스포츠 모드로 배기 플랩을 열면 곧바로 55.7dBA까지 오르며 V12 엔진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줬다.
PERFORMANCE (기본 성능)
V12를 포함한 고사양 엔진의 존재는 프리미엄 등급 이상의 자동차 시장에서 전동화 전환에 대한 필요성을 낮추는 요인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엔진 회전수 전 영역에 걸쳐 끊임없이 계속되는 토크, 고속 영역에서도 지속해서 느껴지는 영혼을 품은 가속력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배기음, 아직 이런 매력을 가진 V12 엔진을 대체할 솔루션이 없기 때문이다.
푸로산게의 V12 엔진의 최대 회전수는 8250rpm이다. 고회전 엔진의 성향은 저속 회전에서 토크가 약할 것 같지만 V12에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어느 영역에나 차고 넘치는 두터운 토크를 갖춰 일상 영역에서 가속 페달에 힘을 주지 않고도 낮은 엔진 회전수 범위에서 잔잔하고 우아하게 도로를 누빌 수 있다.
엔진 회전 수 별 토크의 변화도 크지 않다. 푸로산게에 얹힌 V12 F140 엔진은 다양한 모델들의 특성에 맞춰 알맞게 튜닝되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엔진으로 보지 않는다. 푸로산게는 특성이 꽤나 순종적으로 다듬어져 과거 페라리의 4시트 모델인 FF 및 GTC4루소와 비교될 수 있겠다.
0-100km/h 가속 기록은 한 번만 이뤄졌다. 차량 제공사 측의 요청 때문이다. 그렇게 푸로산게가 기록한 시간은 3.61초.
우리는 수많은 차량들의 가속, 제동 기록을 계측하며 노하우를 갖게 됐는데 일부 고성능 모델들은 시험 횟수가 반복될수록 기록이 점진적으로 개선되는 경향을 보인다. 타이어 온도의 적절한 상승 그리고 배기 촉매 및 엔진 오일 온도의 적절점 도달 등 다양한 변수 때문이다. 참고로 0-200km/h 계측 기록은 11.80초로 나왔으며 이때는 성인 1명이 뒷자리에 탑승했었다. 참고로 제원상 기록은 10.6초다.
100-0km/h 기준 제동 기록은 페라리 발표 기준 32.8m인데 오토뷰가 계측했을 때 32.91m로 근소한 차이를 보였다. 계측을 진행하기 이전에 타이어 웜업을 진행했는데 제대로 계측 기록을 위한 환경을 만드는 한편 안전한 시승과 함께 타이어를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정차상태에서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으면 폭넓은 8250rpm까지 엔진 회전수가 쉴 새 없이 오르고 내린다. 그리고 변속기는 꾸준히 기어를 위로 넘긴다. 기어비는 효율 위주로 맞춰진 모양새다. 이러한 설정도 과거와 다르다. 이전 모델들은 전자 장비 성능이 완전하지 못했던 탓에 저속 기어의 기어비를 길게 설정했던 경향이 있었다. 항상 접지력 대비 엔진의 출력이 지나치게 강했던 것이 이유다. 효율을 뒤로하고 과거 모델들이 기어비를 길게 가져갔던 덕분에 아주 긴 호흡으로 저속에서 엔진 회전수를 끝까지 끌어내 V12 엔진이 가진 출력과 감성을 만끽하기는 좋았다. 효율 배반적이지만 감성적으로는 정말 좋았다. 지금의 푸로산게는 같은 방식으로 엔진을 맛보는 시간이 너무 짧다. 물론 효율은 장점이다.
HANDLING (핸들링)
브레이크 페달의 감각은 최고다. 그 정교함은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를 전부 가져다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브레이크 페달의 스트로크로만 보면 초반 답력이 강한 편이지만 페라리 특유의 무게감이 어우러져 누르는 만큼 정확하게 반응해 좋았다.
약간의 체중도 실어가면서 페달을 밟는 감각이다. 무게감이 크면서도 눌리는 스트로크 대비 제동에 반영되는 양이 다소 적게 느껴지는 맥라렌과 비교해 푸로산게의 브레이크 페달은 부담 없이 다루기 쉬워 운전자의 자신감을 키워준다.
변속기 세팅도 놀라운 수준이다. 국내 시판되는 모델들에 쓰인 듀얼 클러치 변속기에 대한 아쉬움이 푸로산게의 변속기로 씻어지는 듯하다.
듀얼 클러치 변속기 차량들 특유의 변속 충격이나 언덕 등에서 헤매는 로직에 의한 슬립을 푸로산게에선 느낄 수 없다. 토크컨버터식 자동변속기처럼 부드러우며 자연스럽다. 페라리의 듀얼 클러치 도입 초창기인 2011년대 즈음에 등장했던 모델들에 비하면 정점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 수동모드에서 다운프트를 진행, 기어 매칭을 세련되게 해내는 모습에서 변화를 실감케 한다.
스티어링은 운전자의 조향에 정확하게, 날이 예리하게 선 경향으로 반응한다. 저속 주행에서는 무겁지만 주행이 시작되면 적당하고 진지한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스티어링을 꺾은 채 가속 페달에 발을 올려 후륜 타이어의 접지력 한계에 도달하는 중이다. 이때 후륜 축에서 미끄러짐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쉽사리 느껴진다. 푸로산게의 전자식 LSD가 후륜 축을 단단히 쥐며 V12 엔진의 출력을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후륜 타이어에 보내기 위함이다.
함께 거론될 수 있는 맥라렌, 람보르기니의 모델들과 페라리의 차별점이라면 페라리는 전자제어 시스템의 의존도를 최소한으로 낮춰 한계에서도 운전자 친화적인 선형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운전자가 성능에 압도되는 것이 아닌 통제할 수 있는 파트너로 여지를 둬서 유한하지 않은 자신감을 불어넣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푸로산게에도 그러한 장점이 녹아있다. 파워슬라이드까지 이어지는 한계에 도달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국내 페라리 시승차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요구다.
OE 타이어는 전륜 255/35R22, 후륜 315/30R23 출고 사양의 미쉐린 PS4S를 쓴다. 강력한 제동 시스템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종방향 성능을 갖춰냈는데 횡방향 접지력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타입은 아니었다.
4륜 구동 성능을 탑재했지만 전륜축에 구동을 더한다는 티를 잘 내지 않는다. 가속 페달에 힘을 줬을 때 후륜 축이 움직임의 중심을 이루고 스티어링과 연결된 전륜이 무던하게 방향을 가리킬 뿐 전륜축의 토크가 끌어당기는 모양새가 아니다. 4륜 구동 시스템은 적극성은 더 높은 한계영역에서 명확하게 나올 것이다.
후륜조향장치도 탑재되는데 직진 주행 중 순간적으로 스티어링 조타량을 늘렸을 때 존재감이 드러난다. 덕분에 3018mm에 달하는 휠베이스와 오토뷰 계측기준 2242.5kg의 무게감이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물론 경쾌하다 말할 정도는 아닌데 전장, 전폭, 전고, 윤거 모두 지금까지 페라리가 만든 차량 중 가장 큰 사이즈이기 때문이다. 좌, 우 선회가 거듭될수록 관성에 의한 가속도가 점차 강하게 붙어가는 것으로 체감된다.
중량 배분은 실계측 기준 전륜 48.94%로 확인됐는데 제원상 배분은 49:51로 유사값이 측정됐다. 전륜 축을 기준으로 깊숙이 안쪽으로 자리한 V12 엔진, 변속기를 후륜축에 갖춰 이상적인 배분을 갖게 된 것이다.
RIDE (주행 및 승차감)
승차감은 차체 수평 유지를 최선으로 설정됐다. 코너링 중 하중을 받아내는 안쪽 서스펜션은 단단하게 유지되며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견고하게 짜 맞춰진 하체 감각으로 요철을 밟았다는 정보를 즉각적으로 전달한다. 그럼에도 불쾌한 진동이나 기울어짐을 원만히 조율해 잡아냈다.
오토뷰의 서스펜션 테스트 코스 중 하나인 특수내구로는 휠베이스 3m 내외 또는 이상의 차들에게 난코스다. 충격이 심하게 들어오기 때문. 푸로산게도 역시 그 한계를 넘지는 못했지만 승차감 만큼은 그동안의 페라리 모델에서는 찾기 힘든 최상의 것이었다.
사실 동급이라 할만한 차종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포르쉐의 GT 성향 차량들과 비교했을 때 단단함이 조금 더 부각되는 수준이랄까? 플랫 라이드라고 불려도 좋겠다.
ADAS (운전자 보조 시스템)
차선유지 기능은 차량 운행이 시작되고 바로 작동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주행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 또는 도로 상황이 특정 조건에 부합한다고 판단될 때 활성화가 된다. 시스템은 너무도 신중하고 보수적이다. 사실 사용 조건 충족을 기다리다가 사용을 잊게 될 수준.
조향에 개입하는 모터의 토크도 강하지 않아서 운전자가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떨어졌을 때 최소한의 도움을 주는 정도로 보면 된다.
반면 능동형 크루즈 컨트롤의 차간거리 유지 능력이 좋았는데 독일 프리미엄 제조사 모델들의 세련된 모습과 비교해도 될 수준이었다.
페라리는 자사의 스타일로 SUV를 만들었다. SUV라기 보다 크로스오버의 느낌이 짙지만 최고급 SUV 시장에서 경쟁하는 모델임에 분명하다. 새로운 도전을 페라리만의 스타일로 풀었다고 하면 될까? 분명 람보르기니 우루스, 애스턴마틴의 DBX와는 다른 페라리 만의 느낌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