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 랜드로버, 디펜더를 디펜딩하지 못하다?

  • 기자명 박종제 에디터
  • 입력 2020.09.10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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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 가운데는 디자인도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코카콜라의 병 디자인이다. 허리가 잘록한 코카콜라 병 디자인은 눈을 감고도 알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전세계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디자인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침략자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병 디자인과 조금이라도 유사점이 발견된다면 무조건 소송을 걸었고, 그 때마다 반드시 승소했다.

이런 사례는 최근 테라의 병 디자인에게서도 발견된다. 소용돌이치며 올라가는 병 디자인을 누군가가 먼저 등록했다며 소송을 걸어왔고, 현재 법정 다툼이 계속 되고 있다.

그만큼 기업에게 브랜드 명 뿐만 아니라 제품의 고유한 모양도 무척 중요한 자산이다.

특히 역사가 오래된 회사일수록 자신들만의 독특한 디자인을 지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최근 재규어 랜드로버가 디펜더 디자인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물론 현재 다시 부활한 디펜더를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이 빼앗긴 것은 다름아닌 디펜더라는 이름을 존재하게 해준 올드 디펜더의 디자인이다.

무뚝뚝하게 철판을 구부리고 잘라서 같은 디펜더의 디자인은 랜드로버에게는 무척 상징적인 디자인이자, 그들이 거의 몇 십년 동안 지속적으로 생산했던 디자인이다. 그런데 이 디자인을 영국의 한 억만장자에게 빼앗기게 됐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이네오스라는 독립 자동차 제작사를 설립한 영국의 부호, 제임스 아서 아클리프는 애초에 랜드로버로부터 올드 디펜더의 디자인 판권을 사들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랜드로버는 디자인을 판매하지 않았고 원칙적으로는 여기서 사건은 종결됐어야 했다. 워낙 상징적인 디자인인데다가 랜드로버에게 디펜더의 디자인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네오스가 디자인 판권 매각을 요청한 것은 올드 디펜더를 원하는 고객들이 여전히 있으며, 그들은 앞으로 올드 디펜더를 더 이상 신품으로 구할 수 없으니 자신이 제작해서 판매하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최종적으로 거절당하긴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팀을 꾸려 제작사를 설립했으며, 2017년 경 그레네디어(척탄병)이라는 이름의 오프로더를 세상에 선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만든 오프로더, 그레네디어는 올드 디펜더와 완벽히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물론 일부분이 다소 변경되긴 했지만, 도어의 꺾인 면이나 잘려져 나간 듯한 리어 엔드, 그리고 불룩하게 솟아오른 엔진 후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서 디펜더와 동일한 디자인이었으며, 단지 라디에이터 그릴 위에 DEFENDER라는 레터링만 없을 뿐이었다.

지금 사진에 보고 있는 오프로드 SUV가 바로 디펜더가 아닌 그레네이더이다.

중국의 군소 회사에서 비슷하게 디자인해 만들었다면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끝났겠지만, 이와 같은 행위를 저지른 사람은 다름아닌 영국인이었으며, 심지어 작위를 수여받은 사람이기도 했고, 특히 영국의 거대 화학기업 INEOS의 설립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 상황을 두고 재규어 랜드로버는 당연히 법무팀을 동원해 디펜더의 디자인을 지키고자 영국 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재규어 랜드로버는 “랜드로버 디펜더는 랜드로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여전히 우리의 일부이자 상징인 자동차이며, 디펜더의 독특한 모양은 누구봐도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고, 따라서 전세계적으로도 랜드로버 브랜드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근거로 삼았다.

허나 이에 대해 이네오스는 “디펜더의 모양만으로 재규어 랜드로버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반박했다.

이에 대한 영국 법원의 판결이 나왔는데, 그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영국 법원은 디펜더와 그레네이더 사이에 유사점은 존재하나, 이는 일반 소비자들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특히 디자인 소유권이 등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재규어 랜드로버의 주장을 기각한다는 편결을 내린 것이다. 이에 덧붙여 법원측은 디펜더의 형상 자체가 브랜드의 상징성을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전했다.

이 결과에 대해 당연히 재규어 랜드로버는 무척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인 반면, 이네오스 오토모빌측은 원래 계획대로 그레네이더를 런칭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쁘다라는 소감을 발표했다.

이네오스의 그레네이더는 2021년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현재 프랑스 모젤에 위치한 다임러 공장에서 생산 준비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미 2017년부터 1,800만km 가량을 주행하며 내구성을 포함해 다양한 테스트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마그나 슈타이어가 차체와 서스펜션을 개발, 설계했으며, BMW가 프로젝트용 엔진을 공급할 것이라 알려지면서 현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중국의 군소 회사에서 저지른 행위였다면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끝났겠지만, 마그나 슈타이어, BMW 그리고 다임러 공장에서의 조립까지 진행된다면 신뢰성을 비롯해 성능에 있어서도 크게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재규어 랜드로버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수익과 자산을 빼앗긴 것이라 여기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국 법원에서 이네오스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며, 결국 재규어 랜드로버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생산해왔던 디펜더의 디자인 뿐만 아니라 디펜더로 인해 창출된 수많은 유산까지 고스란히 빼앗길 처지에 놓였다. 자동차의 이름을 디펜더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들은 자산들의 유산을 디펜딩하지 못한 셈이다.

박종제 에디터는?

F1 레이싱 코리아 전 편집장으로 포뮬러 1과 관련된 뉴스 그리고 레이스의 생생한 이야기와 트랙 밖의 이야기를 다수의 매체를 통해 전해왔다.

레드불 코리아, 한국 타이어 매거진 뮤(MiU) 등의 온/오프라인 채널에 F1, 24h 르망, WRC 등 다양한 글로벌 모터스포츠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모터스포츠 및 자동차 전문 에디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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