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랠리 ‘코’ 드라이버, 레이스 은퇴 선언

  • 기자명 박종제 에디터
  • 입력 2021.12.0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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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세바스티앙 뢰브의 레이스 은퇴 발표라면 이보다 더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전하는 소식은 비록 뢰브가 아닌 그의 오랜 파트너 엘레나의 은퇴 발표지만, 뢰브의 은퇴 발표만큼이나 파급력이 크다.

여느 온로드 트랙 레이스와 달리 WRC를 포함한 오프로드 랠리에는 반드시 두 명의 드라이버가 함께 레이스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한 명의 드라이버는 드라이빙, 다른 한 명은 다른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을 코 드라이버라 부른다. 비록 실제 드라이빙은 하지 않지만, 이들은 마치 내비게이션처럼 드라이버가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려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 단순히 길만 알려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방향과 코너의 각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접근하는 과정에서의 속도까지도 대부분 코 드라이버가 불러주는데로 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 드라이버의 판단에 따라 페이스에 아주 많은 차이를 가져온다. 그래서 코 드라이버가 사전 정찰을 통해 기록한 스테이지 분석 노트를 ‘페이스 노트(Pace Note)'라고 부른다.

이들의 역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드라이버와 함께 타이어를 교환하거나 스테이지 중간에 차를 긴급 수리하는 등 모든 레이스 활동에 관여하는, 그래서 랠리에서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존재다. 물론 대중의 관심은 실제 스티어링 휠을 잡고 움직이는 드라이버에게 쏠려 있지만, 오히려 랠리카 안에서 드라이버는 코 드라이버에게 상당히 의존하는 편이다. 특히 아주 급하게 돌아가는 레이스 상황에서는 코 드라이버와의 호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랠리 드라이버는 모국어가 완벽히 통하는 사람을 코 드라이버로 고용하는 편이다. 세바스티앙 뢰브도 마찬가지다. 오랜 해외 활동으로 영어에 능통함에도 불구하고 뢰브는 여전히 랠리 중에는 프랑스어로 코 드라이버와 대화하는데, 시끄러운 랠리카 속에서도 인터컴으로 가장 정확히 그리고 빨리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가 모국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랠리에서 드라이버와 코 드라이버의 관계는 가히 부부의 관계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실제로 뢰브는 자신의 아내를 코 드라이버로 태운 적이 있다.)

코 드라이버의 중요성에 대해 이토록 길게 이야기한 것은 그래야만 이어지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바스티앙 뢰브는 현존하는 최고의 랠리 드라이버이다. 포뮬러1에 미하엘 슈마허가 있고, 모토GP에 발렌티노 롯시가 있다면 WRC에는 세바스티앙 뢰브가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는 랠리 역사상 가장 많은 월드 챔피언십 타이틀을 확보한 최고의 드라이버다. 게다가 그는 모든 모터스포츠 역사를 통틀어 9년 연속 월드 챔피언을 놓지 않은 유일한 드라이버이기도 하다. 그래서 항간에는 뢰브에게 어떤 차를 태워도 월드 챔피언은 반드시 차지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다니엘 엘레나는 그런 뢰브의 옆좌석을 지킨 코 드라이버로, 뢰브가 WRC 데뷔를 하자마자 함께 하기 시작해 올해로 22년째 그와 함께 랠리 스테이지를 달리고 있는 베테랑 코 드라이버이다. 그가 지금까지 소화한 랠리만 해도 무려 180번에 달하며 모두 세바스티앙 뢰브와 함께 였다. 그리고 당연히 9번의 월드챔피언 트로피도 함께 들어 올렸다. WRC 일정상 1년에 2/3를 해외 투어로 소화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각자의 가족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관계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게다가 뢰브와 엘레나는 2020년까지 현대 월드 랠리팀과 함께 현역으로 활동했으며 심지어 뢰브는 아직도 랠리 드라이빙을 그만 둘 생각이 없다.

하지만 엘레나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그는 2022년 시즌을 앞두고 M 스포트와 계약하려는 뢰브를 남겨두고 오랫동안 정들었던 WRC 무대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22년간 함께 한 파트너와 떨어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부모 혹은 아내보다 더 오래 그리고 상상하는 것 이상의 혹독한 일을 함께 겪었던 사람으로써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황혼 이혼보다 더 힘든 일일 것이다. 다니엘 엘레나의 은퇴 이유는 무척 단순했다. 이제는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뢰브는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이들의 삶은 파병으로 이어지는 군인들의 삶 이상으로 고달프다. 포뮬러1과 비슷하게 WRC 역시 1년 중 집에서 잠드는 날이 100일도 채 되지 않는다. 이런 생활을 22년간 지속했다면 그에게 가족은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

놀랍게도 같은 결정을 내린 코 드라이버가 또 있다. 세바스티앙 뢰브의 월드 챔피언 기록에 서서히 다가서는 세바스티앙 오지에의 코 드라이버, 줄리앙 인그라시아다. 줄리앙 역시 오지에와 16년간 함께 한 코 드라이버로 그와 함께 여덟 번의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베테랑 코 드라이버다. 다음 시즌 그리고 그 다음 시즌에도 월드 챔피언 가능성이 매우 높은 팀이자 세바스티앙 뢰브의 기록을 넘어 설 것이라 예측되는 두 사람이 결별하게 된 이유도 동일하다. 바로 가족과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들의 결정은 곧바로 뢰브 그리고 오지에의 경기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드라이버의 눈과 귀이자 그들의 머리 속에 자리한 그래픽 카드처럼 랠리 루트를 설명하고 페이스를 조절하며 수많은 역경을 함께 해쳐나가는 이들의 존재는 아스라다의 AI 컴퓨터 이상이다.

따라서 다음 시즌부터 뢰브와 오지에는 어쩌면 처음부터 새롭게 랠리를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22년, 16년의 세월을 간단히 대체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지에의 아홉 번째 월드 챔피언 도전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도 매우 높다. 어쩌면 뢰브와 오지에 모두 랠리 포디움 맨 꼭대기에 올라서는 일이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과연 두 사람의 남은 랠리 인생은 어떻게 펼쳐질까? 그리고 그들은 오랜 파트너의 부재를 극복할 수 있을까? 또 한 번 오지에의 월드 챔피언으로 2021 WRC 시즌이 막을 내렸지만, 내년 시즌을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종제 에디터는?

F1 레이싱 코리아 전 편집장으로 포뮬러 1과 관련된 뉴스 그리고 레이스의 생생한 이야기와 트랙 밖의 이야기를 다수의 매체를 통해 전해왔다.

레드불 코리아, 한국 타이어 매거진 뮤(MiU) 등의 온/오프라인 채널에 F1, 24h 르망, WRC 등 다양한 글로벌 모터스포츠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모터스포츠 및 자동차 전문 에디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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