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12 엔진으로 부활한 클래식 브랜드 - 들라쥬

  • 기자명 박종제 에디터
  • 입력 2020.09.1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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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나 제품의 이름을 정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제품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좋은 성능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아봐 주지 못하면 결국 팔리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회사들이 제품의 이름 그러니까 브랜드를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하곤 한다.

그런데, 이미 알려진 브랜드의 명성이나 역사와 같은 브랜드 레거시(Legacy)를 이용할 수 있다면 사업은 절반 이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따금 우리가 잘 아는 브랜드에서 그간 만들어내던 제품이 아닌 전혀 엉뚱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런 방식이 바로 브랜드가 쌓아온 인지도를 연관성이 있는 제품을 제조하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이른바 라이선스 제조 방식이다.

반면 어떤 경우는 아예 브랜드를 사버리기도 한다. 과거에는 유명했으나 현재는 명맥이 끊어진 브랜드를 적당한 값어치를 지불하고 사들인 현재의 주인은 과거의 명성과 자신을 연결 짓고 브랜드의 역사에 자신의 제품을 밀어 넣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소개한, 애스턴 마틴의 모터사이클 협업 브랜드, 브러프 슈페리어다. 이 브랜드는 한때 모터사이클의 롤스로이스라 불리기도 했으나 경영악화로 결국 도산했고 한동안 마땅한 새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가 최근 들어 이 브랜드를 사들인 사업가에 의해 다시 부활했다.

이와 유사한 사례들은 수없이 많다. 스페인의 럭셔리 카 브랜드, 히스파노 수이짜가 최근 아주 비싼 가격에 새 주인을 찾은 것도 브랜드가 가진 유산이 새로운 사업에 엄청난 힘이 된다는 것을 간파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또 하나의 클래식 브랜드가 부활을 알렸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들라쥬(Delage)는 1900년대 초, 프랑스에서 태어난 럭셔리카 메이커였다. 혁신적인 발명가였던 루이 들라쥬에 의해 만들어진 이 브랜드는 당시 프랑스에서는 가장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자동차 브랜드로서 이름을 날렸다.

이후 같은 프랑스 출신의 들라예에게 인수되면서 그랑프리 레이스를 비롯해 다양한 모터스포츠에 참가했고, 그 덕분에 럭셔리 스포츠카 메이커로서도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이렇게 시대를 풍미했던 들라쥬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럭셔리 스포츠카에 대한 수요가 완전히 메말라버렸던 시기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모기업인 들라에와 함께 도산하며 1950년대를 기점으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2019년, 프랑스 사업가 로랑 타피가 이 브랜드를 사들이면서 새로운 부활을 알렸다. 그리고 단 1년 만에 이 브랜드에서 첫 번째 자동차가 등장했다. 그것도 1,130마력의 엄청난 퍼포먼스를 자랑하는 하이퍼카로 말이다.

D12로 이름 붙여진 들라쥬의 하이퍼카는 포뮬러 E나 인디카의 익스테리어와 흡사다. 특히 펜더와 노즈 사이에 서스펜션 암이 노출되어 있는 구조와 완전히 밀폐된 글라스 콕핏은 고든 머레이가 디자인했던 카파로 T1를 연상케한다.

캐노피는 마치 전투기 혹은 마세라티의 컨셉트카 버드케이지처럼 앞으로 열리는 타입이며, 루프 위에는 공기를 압축해 전달하는 에어 스쿠프가 장착되어 있다. 에어 스쿠프로 들어온 공기는 차체 뒤쪽에 마운트 된 엔진으로 흡입되는데, 이름에서도 눈치챘겠지만, 이 차의 엔진은 V12 타입으로 이는 과거 들라쥬가 주로 V12 엔진을 탑재해왔던 것과 연관이 있으면서 동시에 하이퍼카로서의 강력한 퍼포먼스를 구현하기 위함이다.

7.6L의 배기량의 이 엔진만으로도 약 1,038마력 가량의 출력을 만들어내는데, 자연흡기 엔진에서 1,000마력을 뛰어넘는 출력을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퍼포먼스라 할 수 있다. 물론 내구성이 어느 정도일지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겠지만, 이것만으로도 부족해 D12는 작은 전기모터를 연결해 1,138마력을 구현했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탑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차의 무게는 고작 1,400kg 정도로 거의 준중형 차의 무게밖에 나가지 않는다.

실내에는 LMP 레이스 카를 떠올리게 하는, 위와 아래가 잘린 스티어링 휠이 마련되어 있으며, 기어 셀렉터는 버튼과 함께 왼쪽과 오른쪽 엄지 손가락 부분에 버튼으로 처리되어 있다. 대시보드에는 80~90년대 레트로 감성을 풍기는 세 개의 모니터가 마련되어 있고, 각각 스피드와 rpm 그리고 차량에 대한 실시간 정보들을 표기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차를 제작하는데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다름 아닌, 1997년 포뮬러 1 월드 챔피언이자 질 빌너브의 아들이기도 한 자크 빌너브다. 그는 레이싱 드라이버로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링에 대한 조언을 보탰고, 나아가 새시와 엔진이 완성되었을 당시 직접 테스트 드라이빙을 하며 D12의 셋업을 찾아내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1,400kg의 무게와 1,038마력의 출력을 통해 D12는 0-100km까지 단 2.5초 만에 돌파하며, 조만간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에서 새로운 기록을 수립할 계획이라 전했다. 이 차는 앞으로 약 30대가량이 제작될 예정이며, 가격은 약 200만 유로(한화 기준 29억) 정도가 될 것이라 한다.

엄밀히 따져, 이 차는 1900년대 초, 아름답고 강력했던 프렌치 슈퍼카의 계보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단지 들라쥬의 배지와 함께 유사점을 찾아가고자 노력한 것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로랑 타피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세상에 알리는데 성공했다. 들라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브랜드가 다시 부활했음을 알리면서 자신의 창작물 D12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 소식을 가장 반길 사람들은 역시나 프랑스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알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으며, 하이퍼카 브랜드의 정점에 닿아 있는 부가티를 더 이상 프랑스의 브랜드가 아니라 비판하는 그들에게, 프랑스 정치가의 아들이자 자신들과 같은 프랑스 국적의 사람이 부활시킨 프랑스의 브랜드인 들라쥬는 알핀만큼이나 각별한 사랑을 쏟을만한 브랜드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독일과 영국에게 빼앗긴 스포츠카 브랜드 배출국으로서의 자존심을 들라쥬를 통해 찾으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박종제 에디터는?

F1 레이싱 코리아 전 편집장으로 포뮬러 1과 관련된 뉴스 그리고 레이스의 생생한 이야기와 트랙 밖의 이야기를 다수의 매체를 통해 전해왔다.

레드불 코리아, 한국 타이어 매거진 뮤(MiU) 등의 온/오프라인 채널에 F1, 24h 르망, WRC 등 다양한 글로벌 모터스포츠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모터스포츠 및 자동차 전문 에디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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