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 사라진 시대를 위한 두 대의 포르쉐

  • 기자명 박종제 에디터
  • 입력 2020.03.1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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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 이른바 세기말 현상이라는 것이 온 세상을 헤집어 놓았다. 유명한 예언가의 모호한 예언을 나름대로 해석한 끝에 지구의 운명 -정확히는 인류의 운명-은 서기 20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고, 질병, 기근, 기후의 대 변화, 핵전쟁 등 그 이유도 다양했다.

사진: 로열티 프리 이미지

하지만 우리는 2020년을 살아가고 있으며, 예언가의 예언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한 이들의 추론 역시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이나 상황들을 보면 아직도 예언가의 예언은 유효해 보인다. 실제로 스페인 독감이나 흑사병 이후 처음으로 펜데믹이 선언될 정도의 심각한 바이러스에 인류 전체가 시달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수십년만에 제네바 모터쇼가 취소되는 상황을 그저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다.

사진: Gemballa

이것이 진정한 인류의 마지막 길인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 정도로 불안감에 휩쌓여 있는 요즘, 잠시 잊혀졌던 두 브랜드에서 문명이 사라진 시간을 살아갈 사람들을 기획한 것 같은 두 대의 특별한 스포츠카를 선보였다.

사진: Ruf

Ruf-Rodeo

한 때 루프(Ruf)는 거의 신화처럼 여겨지던 이름이었다. 겉으론 전혀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왠만한 드라이빙 스킬로는 똑바로 달리는 것도 힘든 CTR 옐로우 버드를 시작으로 이들이 만들어 내던 대부분의 자동차는 포르쉐의 크레스트 로고를 완전히 지워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 앞에 수많은 튜너들이 사그라들면서 루프의 이름 역시 어느틈엔가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루프가 오랜만에 새로운 컨셉트 카를 내놓았다. 이번 컨셉트카의 이름은 로데오. 그간 그들이 소개했던 복사기 이름 같았던 네이밍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이름만큼이나 익스테리어도 기묘하다.

사진: Ruf

우리가 기억하던 포르쉐 911의 분위기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던 말쑥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마치 인류의 대부분이 절멸해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주어온 포르쉐를 멋대로 개조한 듯한 모습이다.

우선 컬러부터 독특하다. 황량한 모래색과 닮은 샴페인 골드 아래에 광택이 사라진 올리브 그린이 칠해져있고, 그 사이를 러스티(Rusty) 레드의 가느다란 선이 가로지르고 있다. 흡사 아프카니스탄에 파병나간 미 공수부대의 위장 컬러가 떠오른다.

사진: Ruf

게다가 올드스쿨 스타일의 프론트 범퍼 앞에는 더욱 더 심하게 녹슨 듯 보이는 캥거루 범퍼도 보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인류 절멸의 시대에 꼭 필요할 것만 같은 굵은 노끈도 함께 메달려 있다. 네 개의 추가된 램프 역시 정크야드에서 주어 모은 듯하다. 아마 가로등은 고사하고 전력 시스템 전체가 망가졌을테니, 한 밤중에 달리려면 랠리카에 쓰였던 저런 램프들이 필요하긴 할거다.

허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녹슨 금속의 느낌만 표현한 것이지 실제로는 캥거루 범퍼와 보조 램프 모두 터프한 가죽으로 감쌌다. 가죽과 노끈을 보니 로데오라는 이름이 왜 붙여졌는지 이해가 간다. 램프와 가죽과 노끈을 제거한 채, 트랙에 세워두었다면 아주 모던해보였을 헤드램프의 디자인이 황량한 모래 언덕에 놓여 있으니 무척 이질적이긴 하다.

사진: Ruf

타이어 역시 보통의 911이었다면 쓰지 않았을 법한 트레드 패턴을 지니고 있다. 마치 터레인 모드라도 지원하는 것 마냥 타이어 역시 험로 주행에 꽤 적합해 보인다. 911을 베이스로 한 모델 치고는 이색적으로 루프랙도 갖췄다. 물론 프랑스 띠뉴(Tignes: 알프스 스키의 성지)로 향할 때 가지고 갈 스키 플레이트를 위한 슬릭한 디자인의 루프랙이 아닌, 그야말로 새로운 노마드(Nomad)들에게 어울릴 법한 터프한 모양새다.

사진: Ruf

이왕 이런 컨셉트로 시작했으니,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엔진 후드에는 아예 야전삽까지 끼워 놓았다. 하긴 온 세상이 모래 투성이일텐데, 삽이 무척 요긴하게 쓰일 상황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

사진: Ruf

인테리어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염색하지 않은 터프한 가죽으로 씌워진 버킷 시트의 가운데를 에스닉(Ethnic) 무드의 텍스타일로 마감했는데, 패턴이 중남미 잉카 제국의 후예들이 사용하는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이 패턴의 텍스타일은 세기말 혹은 인류 멸망 이후를 다루는 영화에 분위기를 살리는 소품으로 자주 등장한다.

센터 터널의 볼륨 다이얼과 스위치 디자인 역시 요즘의 포르쉐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전용 디자인이 아닌, 정크야드에서 맞는 걸로 주어 모아서 겨우 기능만 수행할 수 있게 구성한 느낌이다

사진: Ruf

이런 추측과 달리 루프는 이 차의 이름부터 컨셉트 모두를 미국 웨스턴 컬쳐에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특히 웨스턴 컬쳐의 중심지이기도 한 오클라호마를 여행하면서 이 차의 컨셉트를 구상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름 역시 랄프로렌이 주관하는 로데오 드라이브 콩코르소 델레강스에서 따왔다고 하니, 미국 문화에 심취한 끝에 만들어 낸 컨셉트카라는 그들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있어 보인다.

사진: Ruf

눈으로 보이는 것들은 모두 웨스턴 풍 혹은 이른바 매드맥스 풍의 미학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다. 카본 컴포지트로 만든 모노코크와 함께 4WD가 탑재되어 있으며, 그야말로 루프의 퍼포먼스를 황야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터레인 타이어와 더불어 트레블이 긴 서스펜션으로 셋업을 바꾸었다고 한다.

사진: Ruf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순간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시각에서 루프 로데오는 최후의 순간 이후,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스포츠카로 보인다. 부디 루프의 스포츠카가 저런 식으로 개조되어야 하는 상황만큼은 찾아오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Gemballa Avalanche 4X4

사진: Gemballa

한 때는 포르쉐 위의 포르쉐로, 전세계 자동차 마니아들의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 브랜드는 창업주 우베 겜발라의 비참한 사망 이후 완전히 바스라진 듯 했지만, 그의 아들 마크 필립에 의해 현재까지 명맥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오랜만에 겜발라의 이름으로 색다른 컨셉트 카가 등장했다.

사진: Gemballa

약 4년간의 침묵 끝에 내놓은 새로운 컨셉트카의 이름은 어떤 이들에게는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동경의 대상인 아발란체(Avalanche)로 그 뒤에 4X4라는 명칭이 추가로 붙어 있다.

꽤 높은 지상고에 오프로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본 컨셉트는 루프의 로데오와 무척 비슷해보이지만, 겜발라 특유의 과장된 에어로다이나믹 파츠가 더해져 사뭇 다른 익스테리어를 보여준다.

사진: Gemballa

마치 랠리카를 연상케하는 거대하고 정교한 리어 윙과 더불어 아발란체 4X4의 주된 특징은 루프 로데오 조차 갈 수 없는 곳까지 자신있게 들어갈 것 같은 본격적인 오프로드 타이어와 두터운 타이어만큼 껑충뛰어 오른 지상고에 있다.

퍼포먼스 역시 놀랍기 그지 없다. 약 800마력의 출력을 만들어 낸다고 하며, 0-200km/h까지 단 6.5초면 충분하다고 한다.

사진: Porsche Newsroom

이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던 오프로드 포르쉐는 다카르 랠리에 나갔던 959 랠리카 뿐이었다. 세상이 무너지고, 사회 시스템이 사라진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퍼포먼스는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닌 생존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 Gemballa

겜발라 아발란체 4X4가 루프 로데오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원한다면 2년 이내에 실제로 이 차를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루프 로데오는 원 오프 모델에 그칠 예정이지만, 겜발라 아발란체 4X4는 조만간 실제 차량을 발표하고 예약을 받게 될 거라고 한다.

불안의 시대에 어떤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지금 이 순간, 겜발라로 전화를 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두 대의 기묘한 포르쉐 베이스의 컨셉트카가 등장한 것은 SUV 열풍에 대해 두 튜너가 제시한 대안으로 여겨진다. SUV가 아니면 도무지 판매고를 올릴 수 없는 지금, 두 컨셉트카를 보면서 마지막 자존심과 현실의 수익을 모두 지키고 싶은 두 회사의 처절함마저 느껴진다.

박종제 에디터는?

F1 레이싱 코리아 전 편집장으로 포뮬러1과 관련된 뉴스 그리고 레이스의 생생한 이야기와 트랙 밖의 이야기를 다수의 매체를 통해 전해왔다.

레드불 코리아, 한국 타이어 매거진 뮤(MiU) 등의 온/오프라인 채널에 F1, 24h 르망, WRC 등 다양한 글로벌 모터스포츠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모터스포츠 및 자동차 전문 에디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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